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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키선수들이 아이스링크 장을 누비며 현란하게 움직이고 있다. 스케이트 날이 얼음판을 가르는 날 선 소리가 신경을 날카롭게 하는가싶더니 이번엔 본격적으로 스케이트 날을 가는 걸 보여준다. 매끈하게 잘 빠진 흰색 여성용 스케이트다. 날과 마찰해 위협적으로 반짝이는 불꽃이 미관상 예쁘게 보이다가도, 표정 없는 얼굴로 “조금만 더 갈아주세요.” 라 말하는 수진을 보면 섬뜩하게 느껴진다. 다시 스케이트 날이 갈린다. 영화는 초반부터 극도의 긴장감을 조성한다.
수진(라라)은 차분한 인상을 주는 시나리오 작가다. 대부분 미간을 조금 찌푸린 채여서 한껏 예민해 보이기도 한다. 수진은 정당방위로 판결 난 살인사건으로 시나리오를 쓰려 한다. 실제 사건은 피해자 여성인 이미라가 정당방위라기엔 잔혹한 방법으로 피의자를 죽였다. 피의자는 이미라를 성폭행하려다 죽음을 당했고, 법원은 이를 정당방위라 판결 내렸다. 시나리오 시안을 본 박대표는 이것저것 양념을 추가한다. 이미라를 영화 전반에 걸쳐 형상화 되는 팜므파탈의 이미지로 굳히고 불륜, 사도 마조히즘적 플레이를 끌어와 멜로를 가미한 추리극으로 변모시키려 한다.
보는 이를 불편하게 하는 것도 그 지점이다. 수진 스스로 상처를 끄집어내 삼자의 입장에서 되어 이야기의 살을 덧붙이고 혹은 뺀다. 그럼과 동시에 가상의 인물 ‘라라’가 되어 시나리오와 동일시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상처를 드러냄으로써 동정을 구하거나 동조를 구한다. 수진은 어느 것도 구하지 않는다. 단지 수진은 누군가 제가 잡고 있는 끈을 끊어주길 바란 걸지도 모른다. 표피처럼 수진을 둘러싼 과거의 트라우마를 절단해주기를 바란 걸지도 모른다. 수진은 자전적인 요소가 담긴 시나리오를 씀으로써 자신을 재구성 해 나간다. 동시에 시나리오는 자기 구원적인 도구로 전락하게 된다. 구원은 다른 단어로도 대체될 수 있다. 최면, 위안……
자료 조사에 임하는 수진은 본인이 소재를 발견해 쓰는 시나리오임에도 불구하고 연신 무언가 숨기는 것처럼 보인다. 혹은 무언가 감추는 것처럼. 그래서인지 유독 수진이 틀 너머나 창틀, 차창, 난간 따위의 것들 너머로 시선을 두는 장면이 많다. 진짜 수진은 어딘가에 갇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자기가 쓰는 시나리오임에도 한 발짝 물러나 방관자적 입장을 취한다. 눈빛은 곧 무너질 것처럼 축축한데 냉철하려 보이는 수진의 면들이 오히려 보는 이로 하여금 불안감을 가중시킨다. 평소에 얌전하던 사람이 한 번 폭발하면 걷잡을 수 없듯, 수진은 저만 아는 응어리를 꾹꾹 눌러 담는 것처럼 보인다. 카메라는 그럴 때마다 수진의 뒷모습을 보여준다. 약간의 거리를 둔 채 수진을 방치한다. 계절적 배경과 어우러져 더욱 차갑고 관조적으로 보인다.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는 좋은 기회다. 대상은 약간의 거리감을 두고 바라보면 더욱 선명하게 보이는 법이니 말이다.
김아론 감독은 미쟝센에 능하다. 전작 <온실>은 물론이거니와 <라라 선샤인>에서도 그 재능이 드러난다. 저예산 영화임을 감안한다면 더욱 훌륭하다. 열악한 환경 속에 제작되는 저예산 영화로 도저히 만들어 낼 수 없는 비주얼을 선사한다. 인물과 배경, 갖다 쓰인 소품들 모두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다. 요소 하나를 더 하는 대신 덜어낸 것처럼 씬 하나하나 고민한 흔적이 엿보이는 미쟝센과 미술은 <라라 선샤인>에게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사람들은 힘들 때 자신들을 구원해 무언가를 찾는다. 하지만 그 구원이 스스로에게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더 큰 절망과 고통을 느낄 것이다.”
극 초반, 수진은 날을 예리하게 간 스케이트를 들고 어떤 교수를 찾아간다. 첼로 레슨을 가르쳐주었고, 수진이 스스로 오른쪽 손을 스케이트 날에 내맡기게 한 장본인이다. 교수의 손이 단두대 같은 날 아래 놓인다. “자르세요.” 높낮이 없는 목소리 톤으로 넌지시 자르라 말하는 수진, <중경삼림> 속 누구처럼 노란 가발을 쓰고 무자비하게 교수를 죽이는 라라. 복수 후 라라가 마주한 건 구원이 아닌 원죄보다 더 큰 구렁텅이였을지도 모른다. 복수를 함으로서 자신의 과거가 흐릿해지지도, 속 시원히 보상받지도, 혹은 스스로 구원받지도 못한다. 피 묻은 코트와 끝맺지 못한 시나리오가 남을 뿐이다. 빈 아이스링크에 혼자 서 있는 라라. 화면 서서히 어두워진다.
-INDIESPACE on PAper vol.24 (2009년 10월)






